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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페어웰의 착한 거짓말, 슬픔의 분담, 가족의 유대

by kimibomi 2025. 12. 20.

 

더 페어웰 사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앞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나 역시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며 진실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상대의 평온을 위해 침묵해야 할지 고민했던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영화 더 페어웰은 할머니의 췌장암 말기 판정을 숨기기로 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착한 거짓말이 가진 복잡한 의미를 탐구한다. 손녀 빌리는 서구적 가치관과 동양적 정서 사이에서 방황하지만, 점차 가족들이 공유하는 슬픔의 분담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며 성장해 나간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죽음을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 속에서도 결국 하나로 연결된 가족의 유대를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이 영화가 나에게 던진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방식에 대한 묵직한 질문들을 하나씩 정리해 보려 한다.

착한 거짓말

영화의 중심 설정은 할머니에게 병명을 알리지 않는 것이다. 중국에 사는 가족들은 할머니가 남은 생을 두려움 속에서 보내지 않도록 암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사촌의 결혼식을 핑계로 모두 모여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주인공 빌리는 뉴욕에서 자란 인물답게 처음에는 이러한 착한 거짓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한다. 나 또한 예전에 집안 어른이 편찮으셨을 때, 부모님이 내게 한동안 사실을 숨기셨던 적이 있어 빌리의 마음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당시 나는 왜 나를 어린애 취급하며 소외시키느냐고 항변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침묵이 나를 보호하기 위한 어른들의 방식이었음을 깨달았다. 착한 거짓말은 때로 진실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실을 말해버리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우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숙부는 빌리에게 "동양에서는 생명을 개인이 아닌 가족의 것으로 본다"라고 설명하며 이 거짓말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과 공동체적 사고방식의 충돌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착한 거짓말은 결국 상대방의 고통을 내가 대신 짊어지겠다는 숭고한 약속이기도 하다.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가족들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며, 나는 그 거짓말이 만들어낸 짧은 평화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우리는 흔히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고 배우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정직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존재한다. 착한 거짓말은 차가운 사실보다 따뜻한 배려를 우선시하는 선택이다. 빌리가 결국 할머니를 위해 입을 다물고 함께 웃어주기로 결심하는 과정은 그녀가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단계였다. 나 역시 이제는 무조건적인 진실보다 상대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배려를 고민하게 되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속여야만 하는 그 모순적인 상황이야말로 인간관계가 가진 가장 깊은 심연이 아닐까 싶다.

슬픔의 분담

할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은 그녀가 곧 죽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웃고 떠드는 연회 속에서도 문득문득 비치는 슬픔을 억누르며 슬픔의 분담을 실천한다. 혼자서 암이라는 공포를 감당하게 하는 대신, 온 가족이 그 슬픔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할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지켜내려는 것이다. 나도 상을 당했을 때 찾아와 준 친구들이 아무 말 없이 내 곁을 지켜주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들은 내 슬픔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지만, 함께 있어 줌으로써 내가 짊어진 슬픔의 분담에 참여해 주었다. 그 온기 덕분에 나는 가장 어두운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영화는 억지스러운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음식을 차리고, 사진을 찍고, 사소한 일로 다투는 일상의 풍경 속에 슬픔의 분담을 녹여낸다. 할머니에게 병명을 숨기는 행위 자체가 가족들에게는 거대한 심리적 부채가 되지만, 그들은 기꺼이 그 부채를 공동으로 책임진다. 이것은 서구의 독립적인 개인으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지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으로서 이 정서가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졌다. 슬픔의 분담은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빌리의 아버지가 남몰래 복도에서 눈물을 훔치는 장면은 슬픔의 분담이 가진 무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어머니 앞에서 아들이자 가장으로서 꼿꼿함을 유지해야 하지만, 밀려오는 상실감을 온전히 지워내지는 못한다. 나 역시 부모님이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시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부모님이 짊어진 슬픔의 분담에 나도 기꺼이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이란 결국 즐거움보다 고통을 나누어 가질 때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지는 관계라는 것을 영화는 담담하게 역설한다.

가족의 유대

뉴욕과 중국이라는 물리적 거리, 그리고 오랜 시간 떨어져 살며 생긴 문화적 간극도 가족의 유대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빌리는 할머니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자신을 지탱해 주는 뿌리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빌리가 뉴욕 거리로 돌아와 할머니가 가르쳐준 기합 소리를 내뱉는 장면은 가족의 유대가 시공간을 초월해 이어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도 해외에서 생활할 때 문득 부모님이 즐겨 쓰시던 말투나 습관이 내 안에서 발견될 때마다 묘한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지만, 가족의 유대만큼은 끊어지지 않는 끈처럼 우리를 붙잡아준다. 영화 속 가족들은 비록 의견 차이로 다투기도 하고 서로를 원망하기도 하지만, 할머니라는 커다란 존재 아래에서 결국 하나가 된다. 가족의 유대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것은 함께 먹은 음식의 맛, 공유한 기억의 조각들, 그리고 서로를 향한 말 없는 믿음으로 구성된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본 뒤, 한동안 소홀했던 친척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했다. 거창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그 연결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실을 말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며, 때로는 침묵과 거짓이 더 큰 사랑일 수 있다는 것을 더 페어웰은 가르쳐주었다. 가족의 유대는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고 여전히 건강하게 사시는 실제 후일담을 들었을 때, 나는 착한 거짓말과 슬픔의 분담이 만들어낸 기적이 정말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가족과 함께 혹은 혼자서라도 꼭 감상해 보길 권한다. 당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이 시간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다시금 깨닫게 될 것이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빌리와 할머니의 그 따뜻한 포옹은 여전히 내 가슴속에 온기로 남아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별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 이별이 슬픔만으로 기억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 속에 녹아있는 가족의 유대 덕분일 것이다. 나 또한 내일 마주할 나의 가족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눈빛을 건네보려 한다.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며, 그 마음이 닿는 곳에 진정한 치유가 있음을 잊지 않겠다. 오늘도 평범하지만 소중한 하루를 선물해 준 나의 가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