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국열차〉의 핵심 축은 단순한 생존의 서사가 아니라, ‘꼬리칸에서 머리칸으로 이동한다’는 상징적 여정이 인간 욕망의 양면성과 본질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에 있다. 꼬리칸은 결핍과 억압, 생존의 가장 낮은 단계에 놓인 집단이고, 머리칸은 풍요·권력·쾌락·지배의 상징이다. 이 이동은 물리적 거리의 문제를 넘어, 누군가는 평생 꿈꿔도 닿을 수 없는 ‘위쪽 세계’로 향하는 계급 도약의 메타포이자 인간이 갖는 가장 오래된 욕망—더 나은 자리, 더 나은 조건, 더 큰 권력에 대한 갈망—을 비추는 장치다. 이 글에서는 커티스와 꼬리칸 사람들의 전진이 단순한 혁명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굶주림, 인정 욕구, 성장 욕망, 불안, 공포까지 포괄하는 복합적 감정의 집합체라는 점을 깊이 있게 알아보려고 한다. 나아가 그 여정이 결국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설계되고 통제되는지, 심리적 압박에 의한 자신에 대한 성찰을 알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왜 ‘머리칸 도달’이 우리에게 종종 허상처럼 작동하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설국열차가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닌 심리·사회학적 텍스트로 기능하는 이유를 살펴본다.
설국열차 욕망의 양면성
〈설국열차〉에서 꼬리칸 사람들이 머리칸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본능적인 욕망—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움직임—의 집약체다. 꼬리칸 사람들은 단백질 블록을 나눠 먹으며 생존의 최소 조건만을 겨우 충족시키며 살아간다.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 외에는 삶의 질이라 부를 만한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기차의 앞쪽 세계는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화려한 색감, 넘치는 음식, 깨끗한 공기, 안락한 환경,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 등 모든 것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대비는 설국열차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 중 하나이며, 영화는 관객에게도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너라면 어떤 칸에서 살고 싶은가?” 하지만 욕망은 단순히 결핍을 채우기 위한 움직임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상상을 해봤지만 당연히 기차의 꼬리칸이 아닌 앞쪽 칸에서 살고싶다고 생각을 했다. 영화는 꼬리칸 사람들이 머리칸으로 향하는 그 여정을 통해, 인간이 가진 훨씬 복잡한 내면의 욕구를 드러낸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존재 가치가 증명되고 싶다는 갈망, 더 이상 누군가의 발아래에서 지내지 않겠다는 저항, 스스로가 통제력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 본능.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반복적으로 목격되는 인간 행동의 기저에 놓여 있다. 특히 커티스의 여정은 욕망의 양면성을 잘 보여준다. 그는 처음에는 단순히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리더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의 욕망은 점점 개인적이고 복잡해진다. 그는 누군가보다 앞에 서고 싶어하며,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 받고자 하고, 꼬리칸에서의 과거를 뛰어넘고 싶어 한다. 그가 머리칸에 가까워질수록 욕망의 실체는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이러한 변화는 영화의 심리적 긴장을 극대화한다. 결국 설국열차의 ‘이동 서사’는 단순한 계급 이동이 아니라 욕망을 향한 인간의 본능적 움직임을 은유한다. 우리는 늘 더 나은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 자리가 정말로 나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 모순된 움직임이 설국열차의 핵심이자, 관객이 본능적으로 공감하는 지점이다.
심리적 압박
꼬리칸에서 머리칸으로의 이동은 ‘희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설계된 욕망의 경로다. 설국열차는 욕망이 개인적인 것 같지만 사실 시스템에 의해 조작되고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먼저, 꼬리칸 사람들은 머리칸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더 나은 삶”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정보 불균형과 희망의 신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와 정확히 같다. 사람들은 상위 계층의 삶을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미디어나 사회 구조 속에서 그 삶이 ‘이상적’이라고 세뇌되며, 이는 더 높은 칸을 향해 움직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그곳에 도달했을 때의 충격을 통해 진실을 드러낸다. 머리칸은 완벽한 천국이 아니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기형적인 시스템이었다. 커티스의 여정은 욕망이 어떻게 개인을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예다. 그는 혁명이라는 명분으로 이동했지만, 실상은 자신이 과거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원 욕망’이 뒤섞여 있다. 가장 약한 사람을 먹고 버텨야 했던 과거,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스스로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심리적 압박은 머리칸에 다다를수록 더 강하게 드러난다. 결국 커티스는 머리칸에서 진정한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끝이 아무것도 채워주지 못한다는 잔혹한 진실과 마주한다. 머리칸 사람들의 욕망은 또 다른 방식으로 왜곡되어 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지만, 더 많은 안정과 더 확실한 지배를 원한다. 이 또한 인간 욕망의 어두운 면이다. 결핍에서 출발한 욕망은 채워지지 않음의 고통이지만, 충족된 상태에서의 욕망은 끝없는 탐욕으로 흐른다. 설국열차는 이 양극단의 욕망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시스템을 유지하는 순환 구조임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즉, 꼬리칸에서 머리칸으로의 이동은 단순한 반란의 길이 아니라 욕망이 어떻게 생겨나고, 증폭되고, 시스템에 이용되고, 결국 개인과 집단을 파괴하는지에 대한 메타포다. 이 여정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인간 본능 자체를 찬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꿈이 허상일 수 있음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자신에 대한 성찰
〈설국열차〉의 꼬리칸에서 머리칸으로 향하는 여정은 단순히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욕망의 본질을 해부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늘 더 나은 자리를 꿈꾸고, 그곳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삶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우리가 믿는 ‘더 나은 자리’가 실제로 치유와 자유를 가져다주는 곳인지, 아니면 또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허상인지 묻는다. 커티스가 머리칸에서 발견한 진실은 욕망의 끝이 결코 구원의 장소가 아님을 보여준다. 심지어 시스템은 개인의 욕망을 이용해 스스로 유지된다. 꼬리칸 사람들은 부당함에 저항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그 움직임조차 윌포드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설계된 구조 안에서 선택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욕망은 위험한가?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다.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이유를 잃는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그 길이 정말 나를 위한 길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설계해놓은 길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설국열차는 이러한 메시지를 던진다. “진짜 자유는 머리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열차 밖을 바라볼 용기를 갖는 것이다.” 욕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그 욕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성찰하는 것. 그때 비로소 우리는 꼬리칸에서도, 머리칸에서도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