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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걸 깊이 읽기 (도덕적 결정, 의료 현실, 사회 무관심)

by kimibomi 2026. 1. 12.

언노운걸 사진

2016년 다르덴 형제의 영화 《언노운 걸(The Unknown Girl)》은 단순한 미스터리 추적극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한 젊은 의사의 도덕적 결정과 그에 따른 내면의 흔들림,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사회적 책임을 유보하는지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합니다. 영화는 살인을 둘러싼 추리가 아니라, “그날 문을 열었더라면”이라는 작은 선택이 얼마나 큰 죄책감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사회 전체가 한 생명을 놓치는 구조 속 의료현실에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조용히 묻습니다. 이 글은 《언노운 걸》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쉽게 사회 무관심이라는 폭력을 행사하며,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들여다봅니다. 실제 제가 겪은 유사한 상황도 함께 녹여 공유해보려 합니다.

언노운 걸에서 발견한 도덕적 결정의 무게

주인공 제니는 젊은 여성 의사입니다. 하루는 진료시간이 끝난 후 누군가가 급하게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시간 이후엔 응급 상황이 아니면 진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자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 선택은 잠시 후 뉴스 속 익명의 여성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경찰은 그 여성이 제니의 병원에 들렀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그녀가 문을 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단순한 ‘죄책감’이 아니라, 의사라는 직업의 윤리적 책임, 그리고 ‘무심한 결정 하나가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듭니다. 제가 병원 홍보 콘텐츠를 제작하던 시절, 한 지역 응급실에 대해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한 간호사는 말했습니다. “우린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하게 돼요. 이 환자를 먼저 볼 것인가, 저 사람은 조금 더 기다려도 되는가. 그게 생명과 직결될 수 있단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모든 걸 완벽하게 할 순 없어요.” 이 말이 영화 속 제니의 상황과 겹쳐졌습니다. 도덕적 결정이란, 늘 명확하거나 옳은 게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선택해야 하는 것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의료현실과 시스템

영화는 단순히 제니의 개인적 죄책감만을 파고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르덴 형제는 그녀의 고민을 통해 공공의료 시스템의 허점을 짚으며 의료 현실을 보여줍니다. 제니는 죽은 여성의 정체를 추적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협조를 구하지만, 아무도 적극적으로 나서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병원장도 그녀에게 “왜 굳이 이 사건을 네가 책임지려 하냐”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화는 아주 조용하게 말합니다. “왜 사회는 항상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가?” 이 장면에서 저는 과거, 지역 보건소 캠페인 영상 제작 당시 느꼈던 괴리를 떠올렸습니다. ‘공공의료 확대’, ‘시민과 함께하는 안전 시스템’이라는 표어 뒤에 감춰진 현실은, 결국 의료진 개개인이 자신의 양심과 판단으로 모든 걸 떠안아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예산 부족, 인력난, 지침의 부재 속에서, 그들은 매일 ‘문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습니다.《언노운 걸》은 그런 구조를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대신, 한 사람의 심리와 실천을 통해 얼마나 제도적 무관심이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지를 체감하게 합니다.

사회무관심의 공범 구조

제니는 자신이 문을 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자책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죽음을 ‘사회 전체의 책임’으로 느낍니다. 그 죽은 여성은 불법 체류자였고,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누군가에게서 쫓기듯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즉, 사회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물이었고, 그래서 쉽게 ‘사라질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뉴스에서 ‘발견되지 못한 시신’, ‘신원 미상의 여성’, ‘방치된 아동’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곧잘 ‘누군가는 왜 도와주지 않았을까?’라며 말하죠. 하지만 정작 그 ‘누군가’는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지 않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한밤중 귀가 중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을 외면하고 지나친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엔 ‘무섭기도 했고, 괜히 오해 살까 봐’라는 이유를 댔지만, 몇 날 며칠 동안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언노운 걸》은 그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했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관심’을 정당화하는지를 거울처럼 비춰주었습니다.《언노운 걸》은 작은 결정 하나가 얼마나 큰 파장을 낳을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다르덴 형제는 ‘범인을 찾는 이야기’ 대신, 우리가 외면한 사람들의 이름을 찾아주는 여정을 통해, 책임, 윤리, 무관심이라는 키워드를 새롭게 조명합니다. 제니는 그 어떤 보상도 없이 스스로 그 책임을 감당하며, 진짜 의사로 거듭납니다.

이 영화는 ‘너라면 문을 열었을까?’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단지 의사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오늘, 누군가의 요청을 무시하지 않았나요? 혹은 무관심으로 누군가를 사라지게 만들진 않았나요? 그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의 도덕성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