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어디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수 있을까. 나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고통스러워했던 경험이 있기에, 영화 위플래쉬 속 앤드류의 모습이 마치 거울처럼 느껴졌다. 최고의 재즈 드러머가 되고 싶은 청년과 그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폭군 선생 플레처의 관계는 완벽을 향한 집착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 내내 흐르는 긴장감 넘치는 비트 속에서 발생하는 두 주인공의 광기의 충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 처절한 사투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한계의 초월은 예술적 성취가 가진 양면성을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오늘은 이 강렬한 음악 영화가 나에게 남긴 질문들을 기록해 보려 한다.
위플래쉬에서 볼 수 있는 완벽을 향한 집착
영화 위플래쉬 속 셰이퍼 음악학교의 신입생 앤드류는 전설적인 드러머가 되기 위해 손가락이 터져 피가 날 때까지 연습에 매진한다. 이러한 완벽을 향한 집착은 주변의 평범한 일상이나 연인과의 관계조차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 나도 예전에 자격증 시험이나 중요한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 주변의 모든 연락을 끊고 오직 목표에만 매몰되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것이 열정이라고 믿었지만, 돌아보니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감정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앤드류의 차가운 눈빛은 목표 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고독을 대변한다. 플레처 교수는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말은 '그만하면 잘했어'다"라며 제자들을 가차 없이 몰아붙인다. 그의 가학적인 교육 방식은 완벽을향한집착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나 역시 엄격한 스승이나 상사 밑에서 주눅 들어 본 경험이 있는데, 그때 느꼈던 공포가 오히려 나를 성장시켰는지 아니면 영혼을 파괴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답을 내리기 어렵다. 영화는 성취를 위한 독려와 가스라이팅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시종일관 비춘다. 완벽을 향한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경이롭지만 그 이면은 참혹하다. 앤드류가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피를 흘리며 무대 위로 올라가는 장면은 그 집착이 이미 광기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나도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성과에 집착했을 때 느꼈던 기묘한 고양감과 공허함을 기억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완벽해지려 하는 것일까. 영화는 화려한 연주 뒤에 숨겨진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광기의 충돌
영화의 백미는 플레처의 압박과 그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앤드류 사이에서 벌어지는 광기의 충돌이다. 플레처는 모욕적인 언사와 폭력을 동원해 제자의 한계를 시험하고, 앤드류는 그 독설을 연료 삼아 자신의 연주를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이러한 광기의 충돌은 관객들에게 불쾌함과 동시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나도 경쟁이 치열한 환경에서 누군가에게 지지 않으려 독기를 품었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 내 안에서 솟구치던 파괴적인 에너지가 떠올라 몸서리쳐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넘어, 서로의 광기를 자극하고 완성해주는 기괴한 공생 관계로 발전한다. 광기의 충돌이 일어나는 무대 위에서 인간적인 도덕이나 예의는 사라지고 오직 비트와 박자만이 생존의 기준이 된다. 나 역시 조직 안에서 성과를 위해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오직 결과만을 향해 돌진하던 동료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 사이의 불꽃 튀는 긴장감은 효율을 높일지는 몰라도 주변 사람들을 모두 태워버리는 산불과 같았다. 광기의 충돌은 결국 둘 중 하나가 파멸해야 끝나는 전쟁처럼 느껴진다. 플레처는 앤드류의 인생을 망가뜨리려 음모를 꾸미고, 앤드류는 무대 위에서 그를 압도하며 복수한다. 이 피 튀기는 대결 속에서 음악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닌 살해의 도구가 된다. 나는 이 장면들을 보며 성공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수많은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진정한 예술은 고통 속에서만 탄생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는 그 고통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인지 묻게 된다.
한계의 초월
영화의 마지막 9분 동안 펼쳐지는 드럼 솔로는 앤드류가 마침내 한계의초월을 이루어내는 순간을 담고 있다. 플레처의 지휘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박자를 이끌어가는 그의 모습은 감옥을 부수고 나온 야수와 같다. 나도 살면서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벽을 넘어섰을 때 느꼈던 그 짧은 쾌감을 기억한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나 자신과 대상만이 존재하는 무아지경의 상태였다. 앤드류의 연주는 그가 겪은 모든 수모와 고통을 승화시킨 결과물이었다. 한계의초월을 경험한 앤드류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미소보다도 지독한 광기가 서려 있다. 그는 결국 플레처가 원하던 '제2의 찰리 파커'가 되었지만, 그 대가로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영원히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무언가를 이뤄냈을 때 얻은 성취감 뒤에 찾아오는 지독한 고독을 경험한 적이 있다. 높이 올라갈수록 시야는 넓어지지만 발을 딛고 선 자리는 좁아지기 마련이다. 영화는 그 정점에서 마주하는 짜릿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전달한다. 결국 위플래쉬는 우리에게 성장의 잔인한 얼굴을 보여준다. 한계의초월은 아름다운 노력 끝에 찾아오는 상이 아니라, 자신을 완전히 연소시킨 뒤에 남는 재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드류가 마지막에 보여준 그 압도적인 연주는 부정할 수 없는 전율을 준다. 나 또한 내 삶의 어느 지점에서 그토록 뜨겁게 나를 불태워본 적이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비록 그 길이 가시밭길일지라도 자신의 정점을 확인하고 싶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영화는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영화가 끝나고 침묵이 찾아왔을 때, 나는 한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완벽을 향한 집착이 만들어낸 비극과 승리는 내 가슴속에 복잡한 감정의 파도를 일으켰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한계의초월을 꿈꾸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멈춰 서서 고민해봐야 한다. 앤드류의 드럼 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맴돌며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당신의 연주를 위해 영혼을 팔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하며, 다만 오늘 내가 내딛는 한 걸음이 나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성장시키는 길이었기를 바랄 뿐이다.